한국의 명시2010. 10. 22. 11:08

      향 수

      -정지용 -

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

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

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

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

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,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

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

짚 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

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

흙에서 자란 내 마음,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

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 섶 이슬에

함초롬 휘적시던 곳

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

전설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

어린 누이와,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

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

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

하늘에는 성근 별,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,

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

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

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

정지용(鄭芝溶 , 1903~1950) 시인, 충북옥천 출생, 일본 도요시샤대학 영문과 졸업. 초기시는 〈고향〉〈향수〉처럼 향토색 짙은 서정시를 썼으며, 그 이후로는 〈아츰>〈유리창〉등에서와 같이 도시문명에 소재를 둔 모더니즘 풍이었다. 후기에 오면서 〈백록담〉〈장수산〉 등에서와 같이 대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시를 발표함. 시집으로 『정지용시집<'35>』『백록담<41>』등이 있음.

'한국의 명시' 카테고리의 다른 글

성북동 비둘기 / 김광섭  (0) 2010.10.25
나그네 / 박목월  (0) 2010.10.25
귀촉도 / 서정주  (0) 2010.10.22
알 수 없어요 / 한용운  (0) 2010.10.19
가는 길 / 김소월  (0) 2010.10.13
Posted by 도라산