▶◀ 김수환추기경의 선종을 애도하며 님의 아름다운 삶을 엿볼 수 있는 시를 옮김니다.

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

-정호승-



서울에 푸짐하게 첫눈이 내린 날


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


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


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나와


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눈사람 하나 세워 놓고


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


무료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을 퍼주다가


늙은 환경미화원과 같이 눈길을 쓸다가


부지런히 종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


껌 파는 할머니의 껌통을 들고 서 있다가


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로 뛰어내린


한 젊은 여자를 껴안아주고 있다가


인사동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부처님


곁에 앉아 돌아가신 엄마 얘기를

도란도란 나누다가



엄마의 시신을 몇개월이나 안방에 둔


중학생 소년의 두려운 눈물을 닦아주다가


경기도 어느 모텔의 좌변기에 버려진


한 갓난아기를 건져내고 엉엉 울다가



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


부지런히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


소주를 들이켜고


눈 위에 라면박스를 깔고 웅크린


노숙자들의 잠을 일일이 쓰다듬은 뒤



서울역 청동빛 돔 위로 올라가


내려오지 않는다


비둘기처럼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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Posted by 도라산